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별 기대 없이 봤습니다. 원작 소설을 이미 읽은 터라 "어차피 아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앞섰거든요. 근데 극장을 나오면서 세 번은 더 봐야겠다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우주세기 건담 팬이라면, 그냥 보셔야 합니다.
하사웨이 노아라는 인물, 어떻게 볼 것인가
하사웨이 노아(Hathaway Noa)는 건담 시리즈에서 아마도 가장 의견이 갈리는 주인공 중 하나입니다. 그를 단순히 "짜증나는 테러리스트"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퀘스 파라야(Quess Paraya)와 첸 나기(Chan Agi)를 자기 손으로 죽인 이후, 12년 동안 그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청년입니다. 쉽게 말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극심한 심리적 외상이 해소되지 않은 채 방치된 인물인 겁니다.
영화 중반까지 솔직히 몇 번 졸았습니다. 원작을 아는 상태에서 보니 전개가 뻔하게 느껴졌고, 하사웨이가 기기 안달루시아(Gigi Andalucia)에게 또 흔들리는 걸 보면서 "아 얘 또 시작이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퀘스 파라야보다는 낫다지만, 결국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가면서 그 인식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하사웨이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가 드디어 "이해"가 되는 순간이 오더군요. 그는 나쁜 주인공이 아니라, 치료받지 못한 채 이상(理想)에만 매달려 자멸해가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약 처방받으면 좀 드세요, 하사웨이.
이런 캐릭터 설계는 사실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감독이 처음 원작 소설을 집필하던 1980년대 후반의 시대적 맥락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뉴타입(Newtype)이란 진화한 인류를 뜻하는 건담 고유의 설정인데, 쉽게 말해 고도의 감응 능력과 공감 능력을 가진 인간상을 의미합니다. 하사웨이는 그 뉴타입의 가능성을 가지고도 끝내 그것을 자신을 구원하는 데 쓰지 못합니다.
막판 30분의 뉴건담, 왜 이게 올드팬에게 선물인가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예상 못 했던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개봉 전 홍보에서 신기체 아류제우스(Alrious)가 계속 등장했는데, 설정상 아류제우스는 주인공 기체 크시 건담(Ξ Gundam)은커녕 페넬로페(Penelope)보다도 스펙이 낮습니다. 그래서 "뭐 이거 당연히 얻어터지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류제우스 안에 양산형 뉴건담(ν Gundam)이 실려 있다는 걸 풀었을 때, 저는 진짜 극장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양산형 뉴건담이란 아무로 레이(Amuro Ray)가 역습의 샤아(Char's Counterattack)에서 탑승했던 RX-93 뉴건담을 기반으로 한 파생 기체를 말합니다. 1988년작 극장판의 상징적 기체를 2026년의 작화 기술로 다시 보는 경험은, 우주세기 건담 팬으로서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습니다. 역습의 샤아는 지금 봐도 작화 수준이 압도적인 작품인데, 그걸 현대 기술로 재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직접 보셔야 압니다.
거기다 아무로와의 서사까지 연결되는 방식이 절묘했습니다. 하사웨이의 정신 붕괴와 아무로의 기억이 겹쳐지는 연출은, 단순한 팬서비스가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완전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제가 최근에 봤던 어떤 장면보다도, 귀멸의 칼날의 클라이맥스 장면보다도 더 크게 감정이 흔들렸다고 하면 좀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진짜 그랬습니다.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선행 학습이 꽤 있습니다. 최소한 아래 순서를 권장합니다.
-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1988) — 하사웨이의 과거와 아무로·샤아 서사의 결말을 알아야 합니다
- 섬광의 하사웨이 1편(2021) — 하사웨이가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 된 배경과 케네스 슬렉 대령과의 첫 대면을 확인해야 합니다
- 가능하면 원작 소설 — 기기 안달루시아의 신비한 역할과 전체 비극의 구조를 미리 이해하면 감정이입이 달라집니다
물론 소설까지 읽지 않아도 영화 자체로 감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처럼 원작을 다 알고 가도 막판 연출은 충분히 새로운 충격을 줍니다.
토미노의 예언, 50년이 지나 현실이 된 이야기
건담 시리즈를 오래 본 분들은 알겠지만,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단순히 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국가 권력의 부패, 강제 이주, 자원 전쟁, 계층 간 불평등을 다뤄왔습니다. 섬광의 하사웨이의 원작 소설이 발표된 것이 1989~1990년입니다.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보면, 소름이 돋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구연방정부가 자행하는 "인간 사냥"이란 환경 보호를 명목으로 민간인을 강제로 우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뜻합니다. 이게 2020년대의 현실과 너무 겹쳐 보입니다. 기후 위기, 빈부 격차, 이민자 강제 추방. 이 영화가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그대로 담은 우화처럼 느껴지는 건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실제로 기후 변화와 사회 불평등이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국제 연구 기관이 지속적으로 경고해왔습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보고서(출처: UNEP)에 따르면 기후 변화로 인한 강제 이주 인구는 2050년까지 수억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토미노가 소설에서 그린 세계가 단순한 SF 설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프티(Mafty)란 반정부 조직의 이름이자 하사웨이가 사용하는 가명인데, 이슬람 법학자를 뜻하는 '무프티(Mufti)'에서 파생된 단어로 정의를 집행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스스로를 심판자로 규정한 테러 조직이라는 뜻입니다. 그 안에서 고위 관료를 암살하는 행위가 과연 정의인지 폭력인지, 이 영화는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 판단을 관객에게 넘기는 것이 이 작품의 방식입니다.
엔딩에서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Sweet Child O' Mine'이 흘러나올 때, 솔직히 저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토르: 러브 앤 썬더(Thor: Love and Thunder)에서 이 곡이 사용되어 많은 팬들에게 씁쓸한 기억을 남긴 전례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일본어 번역 가사와 함께 흐르는 맥락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렸습니다. 크시 건담의 마스크가 파괴되며 맨얼굴이 드러나는 그 장면과 겹쳐지면서, 이 곡이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게 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곡의 사용이 그냥 멋있어 보이려는 선택이 아니라, 서사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찾아서 배치한 느낌이었습니다.
우주세기 건담을 모르시는 분들에게 이 영화는 진입 장벽이 굉장히 높습니다. 솔직히 건담 자체를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서 감동을 받아야 할지 난감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습의 샤아부터 보고 오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는 그 어떤 최신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경험을 줄 겁니다. 50년 가까운 세월을 쌓아온 세계관이 드디어 21세기의 연출력과 제대로 만난 작품입니다. 최소 역습의 샤아와 섬광의 하사웨이 1편을 먼저 보시고, 극장으로 가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cgv.co.kr/cnm/cgvChart/movieChart/30001083 https://www.unep.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