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솔직히 반은 기대, 반은 걱정이었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1편은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었으니까요. 제가 극장을 찾은 건 개봉 첫 주였습니다. 두 주연배우의 내한 소식이 언론을 달굴 때부터 마음속에 날짜를 찍어두고 있었거든요. 1편을 워낙 복잡한 감정으로 봐온 탓에 이번엔 어떤 기분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될지, 그게 제일 궁금했습니다.
스토리텔링 —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앤디는 앤디다
1편을 처음 봤을 때 저는 미란다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그 끔찍할 정도의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기준을 절대 내려놓지 않는 직업적 완결성은 솔직히 경외감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앤디의 결말은 볼 때마다 불편했어요.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까지 끌어올려준 상사를 감정적인 이유 하나로 등 돌리고 떠나는 장면, 그게 저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1편을 여러 번 다시 봤는데, 매번 파리 장면에서 꺼버리곤 했습니다.
그 앤디가 20년 만에 기획 에디터(Features Editor)로 런웨이에 돌아옵니다. 기획 에디터란 단순히 글을 쓰는 역할을 넘어 매거진 전체의 콘텐츠 방향성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자리입니다. 처음엔 또 그 특유의 스노비즘(Snobbism), 즉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 삼아 패션계 전체를 은근히 내려다보던 시선이 다시 나오면 짜증날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앤디는 성격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지만, 분명히 사회화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런웨이라는 공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1편에서 컬러 협찬 회의를 비웃던 그 앤디가, 이제는 그 회의의 맥락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 저는 그 변화 하나가 2편 전체의 가장 중요한 서사적 전환(Narrative Shift)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사적 전환이란 캐릭터의 외적 행동이 아니라 내적 가치관이 바뀌는 지점을 말합니다. 그게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어서, 저는 이 영화를 1편의 익스텐디드 컷(Extended Cut), 즉 본편 이후에 펼쳐지는 심화 버전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다만 각본의 긴장감은 확실히 1편보다 느슨합니다. 위기의 정점에서 앤디가 택한 해결 방식이 너무 수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휴대폰 하나 붙들고 상황을 관망하는 장면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이 사람이라면 좀 더 치열하게 움직여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 캐릭터의 강도가 딱 두 배씩만 높았어도 훨씬 볼 만한 영화가 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캐릭터 — 미란다의 아우라, 나이젤의 온기
메릴 스트립은 역시 메릴 스트립입니다. 이 문장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대사 없이 패션쇼를 바라보는 장면에서도 화면의 무게중심은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배우의 외적 나이와 아우라(Aura)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이 영화에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아우라란 배우가 화면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발생시키는 특유의 존재감과 흡인력을 의미합니다. 20년 전과 비교해도 그 밀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에밀리 블런트의 에밀리는 여전히 욕심 많고 거칩니다. 며칠을 굶다가 죽기 전에 조금 먹겠다던 그 독함의 잔재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에밀리에게는 1편에는 없었던 입체성(Dimensionality)이 생겼습니다. 입체성이란 캐릭터가 단일한 속성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상반된 면을 동시에 가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속내를 드러내는 장면 몇 개만으로도 보는 사람이 훨씬 편안하게 에밀리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연출이 제법 영리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받은 건 나이젤이었습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스타일도, 안경도, 몸매도 변함없이 멋진 그 아저씨가 예전에 징징대며 귀찮게 굴던 앤디를 은근히 챙겨왔다는 속내를 살짝 드러낼 때, 저는 예상치 못하게 뭉클했습니다. 영화에서 진짜 감동은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온다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그리고 케네스 브래너가 악당이 아닌 역할을 맡은 것도 꽤 오랜만이라 그것도 반가웠습니다.
2편에서 확인한 주요 캐릭터 변화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앤디 삭스: 스노비즘에서 벗어나 런웨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에디터로 성장. 서사의 중심을 잡는 역할이 더 명확해졌습니다.
- 에밀리: 럭셔리 브랜드 임원으로 성장했지만 본질은 그대로. 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입체적 캐릭터로 진화했습니다.
- 미란다: 새 미디어 시대에 적응하려 하지만 자신의 기준은 절대 내려놓지 않음. 스크린 장악력은 여전히 압도적입니다.
- 나이젤: 분량은 적지만 감정의 밀도는 가장 높습니다. 영화 전체의 온도를 책임지는 캐릭터입니다.
패션 비주얼 — 성찬은 가득한데, 배는 얼마나 찼나
비주얼(Visual) 측면만 따지면 이 영화는 분명 합격입니다. 비주얼이란 색채, 의상, 공간 구성 등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의 총합입니다. 뉴욕 거리, 런웨이 세트, 이탈리아 고딕 양식 성당까지, 화면 안에 담긴 것들만으로도 눈은 충분히 호강했습니다. 럭셔리 패션 매거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의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작은 미술 작품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비주얼이 오히려 영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기름진 성찬 앞에서 몇 가지 입에 맞는 음식만 골라 먹고 일어나는 느낌이랄까요. 악마(Devil)라는 단어가 제목에 있는데, 악마가 누구인지 끝내 특정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프라다를 입고 있으니 모두가 악마이거나, 아무도 악마가 아니거나 — 어느 쪽이든 장르적 긴장감(Dramatic Tension)은 약해집니다. 극적 긴장감이란 관객이 결말을 향해 숨을 참게 만드는 구조적 압박을 의미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단순한 패션계 드라마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예술과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점점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만드는 것"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애정 어린 시선이 곳곳에 담겨 있었고, 저는 그 부분에서 이 영화를 지지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속편 영화의 흥행 성패는 오리지널 팬덤의 충족도와 신규 관객 진입 장벽이라는 두 축에 달려 있는데, 이 영화는 전자는 잘 잡았지만 후자는 다소 아쉽습니다.
앤 해서웨이는 역시 앤 해서웨이였습니다. 레미제라블 이후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인데, 영어 발음 하나만으로도 스크린에 집중하게 되는 배우입니다. 그녀가 있었기에 느슨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러닝타임은 금방이지만, 극장 문을 나서면서 큰 여운이 남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게 제가 이 영화를 솔직하게 평가하는 지점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치열한 갈등보다 따뜻한 화해 쪽을 택했습니다. 그 선택을 실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20년이라는 세월이 이 캐릭터들에게 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1편이 아이콘이었다면 2편은 그 아이콘이 나이 든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안정적인 각본과 배우들의 내공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영화입니다. 1편을 인상 깊게 봤다면 극장에서 확인할 가치는 있습니다. 단, 강렬한 빌런이나 날카로운 갈등을 기대하고 간다면 분명 빈 손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내려놓고 보면,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 참고: https://cgv.co.kr/cnm/cgvChart/movieChart/30001089 https://www.kofic.or.kr